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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열사

박창수 열사 묘소 참배 [사진] [건] (1996-04)

박창수 열사 묘소 참배 (1996-04)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던 박창수 열사는 1991년 5월 6일 숨졌고, 6월 30일 묻혔다.

 

그의 죽음은 1987년 민주화운동과 민주노동운동, 그리고 91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출범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길 위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그는 91년 2월 9일 대우조선 투쟁 지원 연대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현장에서 연행돼 ‘제3자 개입금지’ 등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서울구치소 안에서도 강경대 군 폭행치사 사건(91년 4월)에 항의해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는 5월 4일 의문의 부상을 당해 경기 안양병원에 입원했고, 이틀 뒤인 6일 새벽 4시 45분 병원 마당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연히 사인에 의혹이 제기됐다.

부검 영장을 발부 받은 경찰은 다음날 전경 22개 중대와 사복 진압경찰을 동원, 최루탄을 쏘며 영안실에 진입해 고인의 시신을 가져갔고, 그 뒤  ‘공식 발표’된 사인이 비관 투신자살이었다. 구치소 수감 직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로 이감돼 고문을 당했고, 그 와중에 부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왔다는 이야기. 정체 불명의 남자들이 그의 병실을 드나들었다는 증언. 쇠창살과 자물쇠로 봉쇄돼 있던 7층 옥상(경찰은 열려 있었다고 발표)에 그가 어떻게 올라갔으며, 죽으려던 이가 무슨 마음으로 링거 바늘을 달고 있었는지 등등 의혹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해설참조-"24년 전 박창수의 죽음 지금도 베일에" 한국일보 최윤필 기자 (2015.06.29)

 

아래에는 박창수 열사의 투쟁과 관련된 사진기록과 사후에 이루어진 그의 죽음을 둘러싼 갈등 그리고 추모사업과 관련된 기록을 보여준다.